일기를 적는다 말해놓고 이렇게 돼버렸다. 한심하다. 이쯤이면 쉽게 포기할만한데 이번엔 포기도 쉽지 않다. 점심밥을 먹었고 딱히 할 게 없다. 먹기 전에 전화를 한 통 받았는데 보험설계상담원이었다. 모르는 사람과 길게 통화한 것이다. 언제쯤 상담을 끝냈으면 좋겠냐는 말에 결정을 못 내리던 그를 어떻게 떼어내야 할까, 고민하던 차였다. 마침 뜻밖의 전화가 걸려와서 상당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끊었다. 대화를 하다보니까 거실을 천천히 돌며 걷고 있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종종걸음으로 작은 원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어지러움을 느꼈는지 그래서 정신을 차리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무슨 대화를 계속한 것 같은데 별 기억이 없는 걸보니 언제나처럼 별 내용이 아니었나보다. 언젠가부터 한 달 정도의 주기로 전화하는 사람이라서 몸이 불편하고 누구와도 말을 섞고 싶지 않더라도 기운내서 받게 된다. 그럴 땐 상대방의 이름을 반갑게 부르며 받는 것이 효과적이다. 전화한 사람에게 미안함이 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아무 소용없는 짓이다. 내 이런 버릇들이 오히려 상대를 속여 불쾌하게 만들고 다시 나로 하여금 그를 혐오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1일부터 몸살을 앓아서 몽롱하다. 그와는 다음부턴 내가 걸겠다는 다짐을 말하고 전화를 끊었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그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는데.. 거의 해마다 한 번씩 감기 따위로 엄살을 부리는데 작년엔 하는 일 없이 사고가 두 건 있었다. 그것에 대해선 할 말이 없는데 하나는 만취해서 벌어진 일이라서 그렇고 다른 하나는 사고 후 몇 초간의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그 후에 어떻게 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헛웃음이 나온다.
거실에는 티브이가 벽 한편을 막고 맞은편엔 소파가 놓여서 거실을 채웠다. 현관 문 앞에서 거실로 들어오자면 막막해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거실로 통하는 문은 모두 여섯인데 지금 시각까지 내 방에선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조용하다. 써 논 것들은 저녁때 몇 번 읽고 고치다가 손을 놨다. 지우지 못한 건 아직도 후회 중이다. 금방 잊겠지만.
그렇게 저질러놓고 다시 손을 대지 못하는 건 이번만이 아니다. 그것들을 한자리에 모아 펼쳐놓는다. 하나씩 집어서 읽다가 만다. 포기가 이렇게 빠르다. 몇 번은 그걸 읽어준 아이들에게 미안해 죄책감을 가졌다. 그것도 몇 번, 어리석은 자만심이 아닌가로 생각이 그치자 관뒀다. 지금에 와선 마음껏 작품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불만을 키워온 것에 대해 까닭모를 연민이 들기도 하지만 당시엔 자기가 써놓은 걸 두고 부연설명을 하는 모습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는지 모른다. 예를 들어 어떤 선생이 하나를 정해 쓰고 완성해나가도록 하라고 할 때 면전에 대고 비웃을 순 없다. 위안으로 삼을 순 있겠지. 완성이라니.
익숙한 자리가 아니라면 불편함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더욱이 사람들이 모인 단상 앞이라든지 서서 뭔가를 말해야 한다면 내가 들려줄 건 없다. 나도 함께 기다리는 수밖엔 없다. 끝끝내 순서를 받아 두려움에 떨며 말을 시작하는데 질문을 받고 대답을 피할 수 없어서 되묻거나 고집을 피워 상대를 무안하게 만든다. 내 나름에는 요령을 부린 것도 같다. 이 후에 그런 일이 불가피하게 생기면 작은 수첩을 들고 나가 질문을 받아 적고 들여다보며 질문을 되짚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 또한 요령부득이라서 적어놓은 것을 읽으면 다시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지게 된다. 수첩엔 엉뚱한게 적혀있기 마련이다. 일기라고 쓰는 것만 봐도 어디 하나 적을 두지 못하고 헤매는 꼴이다. 이러니 무엇이라도 진전이 있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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